부르심에 합당한 삶 (엡 4:1-16)

유명근 목사
2024-08-04
조회수 171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 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장 1-16절




 

  #‘사랑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내가 선택한 이 남자와 결혼해도 괜찮을까요?’


  바울은 본문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거나 선택된 이들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13에서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선택받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들은 부름이 누구의 부름이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자기 민족을 위하여 예수를 찾아왔던 군중처럼, 때로 우리의 믿음은 욕구에 이끌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을 스승이라고 부르면서도 가르침 받지 않으려 하지 않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뜻이 주님의 뜻보다 앞서고, 우리의 계획이 주님의 섭리보다 중요해질 때도 있기에 우리가 들은 부름이 누구의 부름이었는지 돌이켜보아 그 부르심의 목적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받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이 주는 교훈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의 가치가 손상되지 않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어울리도록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어둠과 죄에서 빛과 의로 부르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라는 값을 치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엄청난 부르심에 걸맞게 사는 삶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 되게 하심을 지켜라(1~6절)

  바울은 본문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 있는지를 말하고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2, 3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3절에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가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하나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나 된 모습을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서 힘쓰고 애쓰는 일에 열심을 내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것, 전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 심방하는 것, 구제하는 것 등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러한 일들은 교회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으로 하나 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을 내고 본 절을 그 근거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 절은 성도들 스스로 하나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힘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성도의 하나 됨은 오직 성령의 일이요,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들을 회심시킨 것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을 회심시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것은 또 누구였습니까? 그것도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회심시켜서 그들을 통해 전혀 새로운 한 몸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전적으로 성령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정령 아름답습니다. 거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바로 인식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회는 정물(靜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결코 한 폭의 그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요, 유기체적인 것이요, 활발히 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살아있고 움직이는 것인 만큼 그것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으며, 분열될 수 있고, 심한 경우 멸절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활발한 노력이 없이는 언제든 깨어질 수도 있고 엎어질 수 있고, 분열될 수도 있고,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그것을 우리가 온전히 지켜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 헌금합니까? 예배든, 기도 집회든, 전도집회든 왜 열심히 모여야 합니까? 왜 심방해야 합니까? 용서해야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 된 것을 지키는 사명이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 것인가를 기억하시고 아주 작은 일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하찮게 보이는 일들일 지라도 하지 않으면 교회는 언제든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또 그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겠습니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합당한 첫 번째의 삶은 바로 하나 되게 하심이 아니라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로 사역하라(7~14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합당한 삶 두 번째는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도록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은사를 성도들 각자에게 주셨을까요?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충만하게 한다’의 원어 ‘플레로오’는 ‘가득 채우다’라는 의미와 더불어 ‘완전하게 하다, 완성하다’라는 의미를 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온전하게하다’ 원어 ‘카타르티스모스’는 ‘준비하다, 갖추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부러진 뼈를 다시 원래대로 맞춘다는 의미이며, 또 그물을 수리하여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준비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말씀만 가지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 말씀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때 이미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음으로 인해 완벽하고 흠이 없다면 사실상 이 말씀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격이나 말이나 행동 모두에 실수가 잦습니다. 구원받고 하나 된 성도는 문제도 없고 완벽하고 온전한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한 모습 투성이 입니다. 그래서 하나 되는 일에 많은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고 또 은사도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바로 그 다양한 은사를 통해 아직 부족하고, 아직 완벽하지 못하고, 아직 실수가 많고, 흉 어물이 많은 우리를 온전히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을 보십시오. 성경이 증거하는 바, 성령의 은사들을 보십시오. 그 다양한 은사들이 말해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없이는 완벽하게 자라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개인의 부족함이라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느 한 부분만 부족합니까?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총체적인 문제요, 부족입니다. 어떤 때는 사랑이 필요하다 하면, 어떤 때는 믿음이 부족하고, 어떤 때는 용서가 필요한가 하면, 어떤 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요구가 밑도 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느 특정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성도에게 다 필요합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필요한 것이 은사입니다. 이제 성령의 은사의 진정한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이것을 알고도 성령의 은사로 교만해 지시겠습니까? 이것을 알고도 성령의 은사를 땅속에 깊이 묻고 썩히시겠습니까?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나갈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대로 은사를 온전히 사용하시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라(15~16절)

  오늘 말씀의 제목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라’가 되겠습니다. 본문 15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본 절의 요지는 우리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 행실의 모든 기준을 ‘참된 것’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 진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가치관의 대변화, 변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진리에 동의하고 동조하는 수준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먼저 우리의 전 사고 체계, 즉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원리와 관점이 예수님의 그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년 이십 년을 믿어도 그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것은 고사하고 예수 믿는 사람인지조차 얼굴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도 그 사고 체계와 가치관이 예수님의 것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편한대로

 

☛ 야고보서 1:6~8 말씀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이유를 본 절 앞서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고린도 전서 13:11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말씀합니다.

 

  ☛ 고린도전서 13:11 말씀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성재가 달라지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참된 것’으로 말미암아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참된 것’은 ‘진리’로 지극히 이성적인 말씀으로는 온전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더 중요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사랑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되 항상 그것을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가치관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 복음 진리의 관점, 우리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른 것을 추구한다고 한들 우리 가운데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완벽하게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매우 미안하고 송구한 말씀이지만 수시로 넘어지고, 주저앉고, 실망하고, 실패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생각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능력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넘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필요한 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성재가 달라졌어요. 가족의 사랑으로~

 

  여러분, 우리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넘어지고, 주저앉았다고 해서 우리를 탓하십니까? 우리를 정죄하십니까? 우리를 질책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때도 다가와서 손을 잡아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용기와 새 힘을 주십니다. 이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칠전팔기의 용기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성도가 진리의 법을 따르는 법은 알아도 이 사랑의 관점을 가지는 것은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가 아닌 도덕적 종교로 변질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율법 종교가 아닙니다. 은혜의 종교이고,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진리를 따르고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로 아시고 이 사랑의 힘으로 스스로를 완성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시므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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