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계 1:4-8)

유명근 목사
2021-11-21
조회수 1903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장 4-8절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신약 성경의 예언서로 알고 읽고 은혜 받고 있습니다. 1~3절은 오늘 본문에 앞서 일반적인 머리말로서 본서의 성격과 목적, 집필 동기, 저자가 기록되어 있고 본서를 읽고 듣는 자들에 대한 복을 3절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선언의 말씀대로 오늘 이 귀한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성도 여러분에게 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형식상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서신 양식으로 기록된 것을 반영하여 본서 수신자를 향한 축도와 그리스도께 대한 송영 및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과 하나님의 자기 선언 등 서신 형식의 머리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록자 즉 발신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리고 수신자는 일곱 교회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아시아 곧 소아시아에 많은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유독 일곱 교회만을 본서의 수신자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상징을 사용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묵시 문학의 표현 방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 일수와 같은 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절대적 완성을 상징하는 완전수요, 전체를 상징하는 보편 수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이처럼 절대적 완성과 보편을 의미한다는 상징성에 기초하여,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본서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만 세대의 모든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요한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영적 교훈을 살펴 볼 때에 피차에 큰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

  본문 4절을 보면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면서 본서가 형식상 서신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다른 서신과 마찬가지로 수신자와 발신자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 서신은 신약성경의 다른 서신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두에 오는 축복의 인사가 다른 서신의 그것에 비하여 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라고 하면 될 것을 여기서는 ‘은혜와 평강’의 근원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서술이 길게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원성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본 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7, 8절에도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원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 특별히 본서에 대한 신빙성과 실효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계시록 2장부터 22장까지의 내용은 허무맹랑한 말씀으로 치부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복이라고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성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진리이기 때문에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며 믿고 따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한 강한 신뢰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갖게 하는 놀라운 성품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은혜와 평강’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가자는 하나님의 집에 신실한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2:6~8절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 2:6~8절 말씀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충성은 오직 그를 보내신 자의 뜻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였던 것입니다. 충성된 증인이 되려면 순교의 정신과 각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영부영 대충 증인이 되려고 한다면 결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5절에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전 15:20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한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표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왈부드(Walvoord) 같은 신학자는 ‘먼저 나셨다’라는 말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라는 말로 문자적으로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머리를 밟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고 따먹도록 유혹한 뱀을 하나님께서 저주하셨는데 배로 기어 다니게 하셨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 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람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또한 뱀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사단과의 영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사망,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한테 발뒤꿈치를 물려 영원히 죽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머리를 밟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하시는 주님에 대한 기록과 해석을 들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혹시 마음이 흥분되고 확신이 넘치고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다짐 내지는 결심 같은 것이 생기지 않습니까?

  여러분,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하시는 근원 되시는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충성의 증인이시며,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이 신앙을 가지셔야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그에게 영광과 능력을 높여 드리기를 원한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주님의 영원성과 충성의 증인,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은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충분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측면을 기록한 5절 하반절과 6절의 말씀은 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능력을 높여 드리고 찬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다같이 5,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5.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곧 성도에게 행하신 일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일회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터지는 샘물처럼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3:1절에 끝까지의 사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는 본서가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독자들에게 너무도 큰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공식화된 박해 속에서 잔뜩 움츠러든 성도들에게 눈물을 자아내는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영광과 능력을 높여 드릴 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본서의 전체적인 주제가 되며 영원한 심판을 면할 유일한 방법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 곧 어린 양의 피의 구속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최고의 사랑 표현입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야 말로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개인의 구원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를 부르사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는 먼저 택함 받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나라 확장의 사명을 부여하심과 동시에 그 때에 이뤄질 메시야의 통치에 동참시킴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주님의 세 가지 사역은 영광과 능력으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의 사역은 누구를 위한 사역인가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를 제사장 삼아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삼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바로 내가 우리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는 사람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감사가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서 가운데서 우리는 이 은혜를 받은 자를 지칭하는 또 다른 호칭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시록 1: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본서의 직접적인 저자인 하나님은 성도를 종이라고 표현하십니다. 5, 6절에서 허락하신 세 가지의 선물은 ‘하나님의 종’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선물을 받은 종은 주인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종인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과연 하나님께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이 땅에서 누리는 최상의 복임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직히 답해야 할 것입니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신뢰하는 것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지 않고 이 땅에서 안락하고 안정된 삶, 곧 하나님의 축복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순종할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인도한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고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기대가 결국 그들의 생을 광야에서 마감하게 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만이 누리는 종의 직무를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며 그분께 영광과 능력을 높여 드리고 찬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부담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최고의 복을 누리는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셋째, 모든 족속이 보기를 원한다,

  본문 7절에 보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라고 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양상의 한 측면을 설명한 것인데, 이 땅의 역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이 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온 우주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천지가 열리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과학이 모든 판단과 삶의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 우주와 이 땅의 역사는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재림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인해 막을 내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매스컴을 보면 지구의 멸망에 대하여 예견할 때에 ‘지구의 온난화 현상’을 말합니다. 얼마 후면 빙하가 녹아 자구는 그야말로 ‘노아 홍수 시대’처럼 물로 뒤덮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문에서는 약 6,500만 년 전 소행성의 지구 충돌로 공룡이 멸종했던 것을 예로 들어 태양 주위를 도는 소행성과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멸망할지도 모르니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뿐 만이 아닙니다. 오존층의 파괴, 식량 부족으로 인한 전쟁, 환경 문제, 심지어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하여 지구는 멸망할 것이라는 주장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압니다.


☛민 23:19 말씀입니다. 
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막 13장에 말씀을 통하여 종말론에 대한 징조,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받았습니다. 종말의 징조는 미혹하는 영의 등장입니다. 재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종말의 끝은 만민에게 복음의 전파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고 약속한 대로 곧 볼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만민이 볼 수 있도록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주님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달 29일 크리스 콕스 메타(구 페이스북) 최고제품책임자(CPO)는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메타버스가 가져올 미래를 현실에서의 이동 제약을 넘어 서로 다른 공간이 연결되는 일상이 구현될 것이라는 설명했습니다.(국민일보,커버스토리)

  콕스 CPO는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보는 수준을 넘어서 특정 공간에서 직접 움직이며 나의 존재감과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메타버스”라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도 메타버스와 연결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사람이 만든 가상공간에서 순간 이동이 가능하여 제약을 받지 않고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못 할 것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만인이 볼 수 있도록 재림하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불신자가 바로 그 대상이 됩니다. 그 이유는 그날이 오면 영원한 사형 선고가 내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인해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지금의 태도와 결정이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어도 영원토록 애곡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요한이 본서의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서신서 형식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느껴지는 확신과 힘은 대답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으로 은혜와 평강을 얻으며, 영광과 능력을 높이고, 주님의 재림을 볼 것이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런 경험과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였기에 이토록 힘 있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증표로 인해 믿음의 고백을 어떤 상황에서든지 담대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받는 복 중의 큰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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